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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정적들

이 글을 올리려고 했던 때는 작년 가을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의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본 밤풍경이 마음에 남았고 동영상을 찍고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사진과 영상만 올리고 비공개로 놔둔 것이 기어코 해를 넘기고야 말았다. 쓰려면 못 쓸 것도 없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블로그를 방치한 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하여 생각난 김에 짧은 글이나마 남겨두기로 한다. 장마철을 좋아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다가도 밖으로 뛰쳐 나가곤 했다. 이 날은 비가 온 건 아니었고 포근한 날이었을 것이다. 집에 들어오는데 문득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스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쳐다보곤 하는데 이 날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들도 가만..

스치는 단상 2024.04.29

[인터뷰] 액자 소설을 포함한 두 작품을 낸 온다 리쿠

일본 경제 신문에 실린 인터뷰로, 원문은 여기 https://www.nikkei.com/article/DGXZQOUD289SV0Y3A420C2000000/ 작가 온다 리쿠가 장편 미스터리 그리고 소설에 나오는 또다른 소설 을 차례로 냈다. 집대성적인 작품으로 창작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5월에 나온 (슈에이샤)가 슈에이샤 문예지 에 연재를 시작한 것은 2007년 10월. 그 후 지면을 옮겨 문예지 에 실렸다. 연재 기간만 따지면 15년이다. 수수께끼의 작가 메시아이 아즈사의 대표작 은 세 번이나 영상으로 제작될 뻔 했지만 그때마다 뜻밖의 사고로 중지되고 저주받은 소설이라는 소문이 돈다. 그 비밀을 쫓는 소설가 후키야 고즈에는 호화 여객선 여행을 통해 관계자를 취재하기로 한다. "애거사..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

요즘 빌리 조엘의 피아노 맨을 즐겨 듣고 있다. 예전에도 즐겨 들었지만 지금은 사뭇 다른 태도로 듣게 된다. 처음 들을 때만 해도 단순히 좋다는 감상외에는 별다른게 없었는데 지금은 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와닿는다. 그런데에는 나에게도 풍파에 시달린 지난한 세월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노래가 어떤 시기에 깊은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철없고 무모하던 어린 시절에는 결코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을, 나이를 먹고 힘든 일을 겪으며 자연스레 터득한다. 그렇게 느낄 수 있는 데는 이 노래가 빌리 조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루종일 떠돌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지친 몸을 이끌고 바에 들어가 술을 주문한다. 꽉 조인 넥타이를 풀고 단추를 푸르며 소매를 접어 올린다. 그리고 천천히 잔을 들어 피..

스치는 단상 2023.07.04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공간

어제부로 이글루스 서비스가 종료되었다. 이런 일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유독 아쉬운 것은, 얼마전 트위터에서 자주 가던 블로그가 오랫동안 활동을 하지 않다가 올초 1월에 니클라스 루만에 대한 포스팅을 올려서 반가웠다는 말을 했는데, 이글루스 블로그였기 때문이다. 예전에 댓글을 자주 달고 메일 교환까지 하며 친분을 쌓은 그 분과 교류는 그 분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블로그를 닫으며 끊어졌다. 그렇게 끊긴 연결고리가 근 십 년만에 다시 글을 올리며 다시 이어지나 싶었고 반가워서 댓글까지 남겼건만 이글루스 서비스가 종료되는 바람에 다시 끊겼다. 그게 너무도 아쉬워 견딜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나 오랜만에 번역가 아사바 사야코의 블로그를 들어가 죽 훑었다. 아사바 사야코는 와카타케 나나미의 에서 ..

스치는 단상 2023.06.17

복수-미시마 유키오

조분샤에서 나온 은 모두 다섯 권으로, 주제별로 모은 앤솔러지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시리즈라 원문을 가다듬어 이해하기 쉽게 고쳤다. 저주 편에는 열한 편의 단편이 실렸는데, 세 편이 전쟁으로 인해 은원 관계가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복수’도 그 중 하나다. 이 단편은 1954년 (줄여서 분슌) 7월호에 실린 것으로, 아들을 전쟁 범죄자로 만들어 교수형에 처하게 만든 남자에게 복수하는 이야기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읊어보자면, 곤도 도라오는 부하이자 같은 마을 사람 구라타니 겐부의 아들을 전쟁 범죄자로 몰아 교수형에 처하게 한다.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겐부는 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 이끈 도라오에게 복수를 맹세한 혈서를 보낸다. 언제 겐부가 찾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도라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