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좋아해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시기도 장마철이다.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가 지배하는 시기임에도 좋아하는 마음을 거두지 않고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에는 늘 죄책감이 서린다. 때가 때인지라 태풍이 불고 수해라도 나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미안해지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마음과 재난은 관계가 없을 듯 하지만 죄책감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저번에 주말에 비가 쏟아졌는데 문득 이 책이 생각났다.
이치카와 다쿠지의 초기 단편 세 편을 묶은 단편집으로, 국내에도 번역되었지만 지금은 절판되었다. 오래 전에 번역서만 보고 말았는데 마침 저렴한 가격에 팔고 있길래 원서를 구입해 다시 봤다. 처음 보고 제목에 반해 읽었고 깊은 우울에 빠진듯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원서로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치카와 다쿠지는 영화로도 나온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부상했는데, 당시 이 소설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끼워팔기로 판매했는데 세중사를 뛰어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영화와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다. 이어서 내놓은 <연애사진>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며 <다만 너를 사랑하고 있어>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로 연애소설가로 부상했고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썼지만 원래 그는 미스터리 작가를 꿈꿨고 산토리 미스터리대상, 아유카와 데쓰야상, 소겐추리단편상에 응모한 바 있다. <온 세상이 비라면>은 그런 경향이 반영된 작품집으로 세 편 모두 사랑과 죽음이 주제다. 표제작 온 세상이 비라면은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던 소년이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을 통해 삶을 고찰하는 내용이다.
시작은 이렇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저 거기에 존재한다. 이 순간도, 그 순간도, 지금도 그 때도 앞으로 다가올 그 때 역시 모든 순간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끝은 끝이 아니다. 그제까지 나날은 영원히 거기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만 보면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연상되는데, 어떻게 보면 이 소설 역시 집착적인 사랑이 만들어낸 시간의 영원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이치카와 다쿠지가 병상 체험과 아내와 연애, 여행 등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온 세상이 비라면 역시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일 년 뒤 비 오는 날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듯 온 세상이 비라면도 비가 키포인트가 된다.
읽고 난 후에는 세 편 모두 절망과 먹먹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이지만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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