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단상

쁘아종과 매그놀리아

디멘티토 2022. 4. 5. 11:22

 

향수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겠지만 언제부터 좋아했느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 밖에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기 때문이다. 확실한 건 어렸을 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향수 냄새를 지독하게 싫어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선물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처음 선물받은 향수가 까사렐의 아나이스 아나이스였는데 처음 경험한 향의 영향이 컸던지 그뒤로도 플로럴 계열 향수가 좋다. 그것도 그윽하고 무거운 쪽 보다 부드럽고 상쾌한 쪽. 

위 사진의 쁘아종은 내 것이 아니라 엄마 것이다. 한 이십여 년 되었나, 선물 받으신 건데 향수를 쓰지 않는터라 여태 가지고 계셨다. 선물한 이가 아들이라 더 특별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선물한 것도 몇 개 되었는데 쓰지도 않고 전부 처분한 걸 보면. 그동안 장식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는데 어쩐 일로 꺼내놓으셨길래 몰래 가져와 한 방울 뿌려봤다. 처음 이 향을 맡았을 때 짙은 향에 눈살을 찌뿌린 기억이 난다. 그 유명한 샤넬 넘버5도 그렇고 메이저 브랜드 향수는 좋아하지 않는데 오랜만에 다시 맡아본 쁘아종은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과히 싫지 않다. 그렇다고 뿌리고 다닐지 묻는다면 당연히 대답은 아니오다. 그저 애틋한 감상이 들었을 뿐이다. 

 

저번에 트위터에 조 말론의 오렌지 필을 샀다가 망했다고 쓴 적이 있는데(https://twitter.com/dimentito/status/1437043958090133506?s=21 )

계속 쓰다 보니 나쁘지 않다. 재구매 할 마음은 없지만 적어도 실패하지는 않았다. 어찌되었건 조 말론이니까. 적응하기 나름이기도 하고. 더구나 새로 만든 자가제 향수와 조합이 썩 괜찮다. 오렌지 필이 톡 쏘는 강렬한 향이라 자가제 향수는 부드러운 향으로 만들었는데 최근에 첨가한 목련향이 신의 한 수 역할을 했다. 잘 가는 아로마 오일 사이트에서 세일을 하길래 냉큼 샀는데 정리할 때 보니 똑같은게 이미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또 사다니 어이가 없어서 향수에 다 부었다. 아로마 오일은 향수로 만들기가 꽤 까다로운데 프래그런스 오일과 달리 냄새가 그다지 좋지 않아-몇몇 향을 제외하고는 시큼털털 내지는 고구마 썩는 냄새같다-좋은 향을 내기가 힘들다. 그야말로 전문가의 영역이다. 

매그놀리아는 약간 달달하면서 톡 쏘는 향이 나는데 만들어둔 향수가 밋밋해서 그런지 지대한 효과를 냈다. 오렌지 필과 섞어쓸 요량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 단독으로 쓰기엔 심심했는데 이렇게 만들어 놓고 보니 단독으로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잘 쓰지도 않은 오일을 두 개나 사서 살짝 난감했는데 이제 길이 생긴 셈이다. 자가제 향수와 오렌지 필, 펜할리곤스의 오렌지블러섬 세가지를 섞으면 그윽하면서도 오묘한 향이 난다. 그리고 꽤 마음에 든다. 

 

 

레플리카의 플라워마켓은 얼마전 백화점에 갔다가 메종 마르지엘라에서 런칭했다길래 궁금해서 시향해 보고 구매했다. 종류가 다양했는데 메인으로 밀고 있는 향답게 이게 가장 나았다. 가볍고 상큼한 꽃향기다. 그외에 다른 향은 별로였다. 안 맡아 본 향 중 괜찮은게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대표로 미는게 가장 좋은 법이다. 아직 오렌지 블러섬도 남아 있고 오렌지 필과 자가제 향수만으로도 충분해 플라워마켓은 사진을 찍고 다시 고이 넣어뒀다. 봄에 뿌리기 좋을 것 같은데 그때까지 오렌지 필이 버텨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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