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올리려고 했던 때는 작년 가을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월의 어느 날,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본 밤풍경이 마음에 남았고 동영상을 찍고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래서 사진과 영상만 올리고 비공개로 놔둔 것이 기어코 해를 넘기고야 말았다. 쓰려면 못 쓸 것도 없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블로그를 방치한 채 어느덧 일 년이 지났다.
하여 생각난 김에 짧은 글이나마 남겨두기로 한다.
장마철을 좋아하기도 하고 비 오는 날이면 집에 있다가도 밖으로 뛰쳐 나가곤 했다. 이 날은 비가 온 건 아니었고 포근한 날이었을 것이다. 집에 들어오는데 문득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스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쳐다보곤 하는데 이 날은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나뭇가지들도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귀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을만큼 조용히 너울대는 가지와 이파리를 보면서 내 마음도 같이 잔잔하게 너울댔다. 이윽고 바람이 멈추고 나무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했다. 다시 너울대기를 기다렸지만 나무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고 온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잠깐이었지만 정적은 깊고 무겁게 모든 걸 지배하고 있었고 이 세상에 오직 나와 나무만 존재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끔 사소한 것에서 경이로움을 느끼게 된다. 길을 걷다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마주하는 하늘, 길모퉁이를 돌아 발견하는 작은 풀포기, 나도 모르게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은 낙엽, 손가락 끝에 와닿는 콘크리트 담장의 까슬거리는 감촉. 그 모든 것이 정적 속에 이뤄진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찰나에.
깊어가는 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짧은 순간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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