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단상

어떤 기억

디멘티토 2023. 3. 28. 12:17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아마 아홉 살 때일 것이다.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되지 않아 외부에 설치되었다. 흔히 말하는 변소였다. 그 근처는 친가 쪽 친척들이 모여 사는지라 그 중 한 집을 방문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용변이 급해 변소를 찾았다. 어렸을 때부터 집 외에 화장실을 가는걸 꺼려했는지라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변소 문을 연 후 보고 말았다. 

거기에는 어떤 여성이 목을 매 죽어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까지 보지는 못했다. 한참을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외면할 수 없어 빤히 쳐다봤다. 그 때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공포나 충격같은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축 늘어진 시신이 그대로 내 안에 들어왔다는 표현이 가까울 것 같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더니 이상하게 여긴 어른들이 와서 그 모습을 봤고 방치된 채 나는 시신을 수습하는 광경을 멀거니 보고 있었다. 어린아이인 나를 신경 쓰는 어른은 아무도 없었고 다들 경황이 없어 우왕좌왕 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 사건은 마을에 소문나는 일 없이 그대로 덮였다. 그래서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다.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이 누구인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하필 장소가 냄새 나는 그런 곳이어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 모습만 각인이 되었다. 시골의 잔인함은 그런 식으로 드러난다.

이후로 화장실 가는게 두려웠고 학교 화장실은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겨우 갈 수 있었다. 그때 본 광경은 내 일부가 되었고 나는 지금도 화장실에 갈 때마다 그 때로 돌아가곤 한다. 외출 할 때 정말 급한 일 아니면 화장실을 가지 않는데 어쩌다 가게 되면 죽음을 향해 한 발자욱 씩 내딛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죽음을 향해 들어갔다 다시 삶으로 나온다. 고통도 없고 두려움도 없고 그저 그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그리고 화장실과 관련된 어떤 장면이나 담론도 견딜 수 없다. 그런게 트라우마라고 하는 것일게다. 하지만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딱히 와닿지 않는다. 

살면서 사람이 죽은 모습을 세 번 봤는데, 첫 번째가 목 매단 이의 모습이었고 두 번째는 친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였다. 그리고 세 번째는 몇 년 전 돌아가신 친척 어른의 장례식 때였다. 첫 번째는 생판 모르는 남이었고 두 번째는 격렬하게 미워한 이였으며 세 번째는 늘 마음이 따뜻해지는 분이었다. 화장하기 전 가족과 인사할 기회를 주는데 평소 그 분을 좋아했기에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생전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병이든 사고든 죽음으로 사람들을 떠나 보내는 일이 많았고 나 역시 세 번의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어 죽음이 가깝게 여겨졌다. 그래서일 것이다. 죽음으로 시작해 삶으로 돌아오는 공포 영화에 빠지게 된 것이. 
대학생이 되어 도서관에 들락거리며 자살에 대한 책만 훑어보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자살 방법론에 대한 책을 탐독했는데 목 매달아 죽은 시신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한 설명에서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죽음이든 시신의 끔찍함은 비슷하지만 목 매 죽는 과정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나아 보일지경이었다. 그래서 자살을 결심했을 때 가장 먼저 제외한 것이 목 매달기였다. 어떤 이유로든 목을 매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 번 다 실패로 돌아갔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죽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상태에 처하면 여전히 강렬한 충동을 느낀다. 다리를 건너거나 높은 건물에 올라갈 때라던지. 고소공포증은 없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 밑을 쳐다보면 나도 모르게 여기서 떨어져 죽으면 어떨까 가늠해 본다. 그 충동이 너무도 강렬해 때로 제어하기 힘들다. 그래서 높은 곳에 오르기를 꺼려한다. 어떻게 보면 그 또한 일종의 고소공포증일지 모르겠다.

공포 영화는 죽음으로 시작하지만 주인공만큼은 끝까지 산다. 그런 면에서 결말은 해피 엔딩인 셈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지만 대개는 그렇다. 아마 그때문일 것이다. 공포 영화에 매료된 이유가. 죽음으로 시작해 삶으로 되돌아오는 이야기니까. 영화 속에서 죽음은 잔인하고 비참하지만 주인공은 끔찍한 상황을 이겨내고 삶으로 돌아온다. 죽어간 이들의 죽음이 어떤 영향을 미칠 지 생각하면 그게 과연 해피 엔딩일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살아남은 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지금도 화장실을 갈 때면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시간이 거꾸로 흘러 나는 변소 앞에 서 있고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때 광경이 펼쳐지지 않는 것에 안도한다. 어릴 때 트라우마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극복할 수 없다. 트라우마라는게 언제 생기든 마찬가지겠지만 어렸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트라우마인지도 모른 채 평생 안고 가야한다. 그리고 그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억누른다. 그게 잘 안 되면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에서 어린아이를 장치로 쓰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격렬한 분노에 휩싸인다. 

왜 공포 영화를 즐겨보는지에 대한 질문을 들었을 때 문득 든 생각은 과연 나는 그걸 즐겼다고 말할 수 있는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즐긴게 아니다. 책에서건 영상에서건 죽음을 접할 때마다 지금껏 떠나보낸 많은 이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때 목 매단 이의 모습이 있다. 죽음은 내 일부이고 나는 영화를 볼 때마다 내 안의 일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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