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톰마소 푸칠리의 열세 살에서 스무살까지 삶을 그린 <폭력적인 삶>(1959)은 파졸리니가 동성애 스캔들로 공산당에서 축출되어 로마 변두리에서 교사 생활을 했을 때 쓴 소설이다. 평전에는 파졸리니의 삶과 결부시켜 <격렬한 삶>으로 옮겼는데(또한 일본판 제목도 激しい生이다) 파졸리니의 삶을 생각하면 어울리는 제목이겠으나 내용으로 보나 소설 속에 그려진 상황을 보나 폭력으로 번역하는게 걸맞는 것 같다. 파시즘이 만연했던 당시 빈민촌에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아이들의 폭력적인 일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1950년 그의 동성애가 만천하에 드러났을 때 파졸리니는 공산당원으로 정치 활동을 하고 있었다. 로마로 쫓겨간 그가 빈민촌의 소년들을 보며 쓴 소설이 거리의 아이들(Ragazzi di vita 1955 평전에서는 발랄한 소년들)과 폭력적인 삶이다. 거리의 아이들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파졸리니는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1953년에서 1961년은 파졸리니가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시기로, 거리의 아이들, 폭력적인 삶 두 편의 소설과 시집, 비평 에세이집을 냈고 열세 편의 영화 대본을 썼으며 잡지에 글을 기고하고 번역도 했다.
파졸리니는 소설이건 영화건 과격하고 선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 때문에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데, 폭력적인 삶 역시 예외는 아니다. 중간에 포기하려고 했지만 어찌하다 보니 끝까지 가게 되었다. 내용이 제대로 생각나지 않아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잠깐 훑어봤는데 몇몇 부분은 여전히 껄끄럽다. 그래서 길게 이어가지는 못하겠다.
작품에서 보여지는 소년들의 폭력성과 야만성은 민중의 특성이기도 한데 이런걸 볼 때마다 성악설을 믿어야 할 지 성선설을 믿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과연 인간의 천성은 선할까, 아니면 악할까.
예전에는 성악설을 지지했는데 요즘은 바뀌었다. 날 때부터 선한 이가 있는가 하면 악한 이도 있다는 쪽으로 말이다. 하지만 여전히 대체로 악하다고 생각한다. 악한 본성이 교육과 사회화를 통해 선한 쪽으로 가는 것이라고. 예외적으로 날 때부터 특출나게 선한 이들이 지도자가 되거나 성인의 반열이 되어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쪽으로 기울게 되지만 인간의 본성은 본래 악하다. 그건 폭력적인 삶 속 소년들을 봐도 그렇다. 순수한 악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난 소년들의 행동은 거침이 없다. 그런 소년들을 개화시키는 것은 교육과 물질적으로 안정된 삶이다. 물론 잘 사는 집에서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다. 어떤 면에서는 성악설을 믿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된다.
이 소설에서 성악설과 성선설을 가르는 경계는 계급이다. 톰마소의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는 마치 내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마구잡이로 사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삶의 희망이 된다. 그런 와중에 이레네를 만나며 큰 변화를 보인다. 공산당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하고 부르주아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서 희망을 찾은 톰마소는 파졸리니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결국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톰마소를 통해 절망으로 바뀌지만 어찌되었거나 파졸리니가 바란 희망은 꺼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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