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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뷰스] 양귀비가 되고 싶었던 남자들- 의복의 요괴 문화지

디멘티토 2022. 4. 5. 11:44

원문은 여기
 

<양귀비가 되고 싶었던 남자들 의복의 요괴 문화지> 다케다 마사야. 

글쓴이 장경(張競)은 중국 상하이 출신으로 현재 메이지 대학 국제 일본학부 교수.



절묘한 제목이지만 단적으로 말하면 중국 여장사라고 해야할 내용이다. 공자나 맹자의 말씀을 떠올리며 읽으면 유쾌하기 그지없다. 복식을 둘러싼 금기와 침범이 왕권의 성쇠를 상징하는 암호로 여겨지는 것 역시 중국적이라 할 수 있겠다.

중국어에 기이한 복장이라는 뜻의 기장이복(奇装異服)이라는 말이 있다. 빈번하게 쓰이는 일상용어지만 일본어로 옮기려면 적당한 말이 없다. 많은 중국인들에게 문화혁명의 기억은 기장이복의 추방과 함께 시작된다. 어느날 갑자기 거리에 홍위병이 나타나 기장이복에 가위를 들이댄다. 기이한 복장이라고 해서 꼭 기발한 디자인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차이나 드레스는 물론 신사복, 원피스 역시 가위에 찢어지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본래 기이한 복장의 기준은 자의적이다.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것 뿐인데 습격당한 사람도 있었다. 홍위병 운동은 근대에 생긴 일이지만 기장이복의 추방은 의외로 오랜 문화의 기억과 연관있을지 모른다. 실제로 고대에는 이단의 복장을 한 사람을 복요(服妖)라 부르며 사회동란의 전조로 여겨 기피해왔다.

의관이라는 말은 중국문화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단순히 복장과 모자, 혹은 정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나 지위, 교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통치의 정통성과 문명의 존재 방식을 상징한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되는 시기에서 볼 수 있듯 복장의 변화를 강요하고 따르지 않는 사람을 처형시키는 일도 있었다.

복식의 기준에 대해서는 오래된 사서 <여복지(輿服志)>에 상세하게 적혀있다. 그런 사료에서 역시 의관 연구가 많이 시행되어왔다. 하지만 복요는 이제까지 주목받은 적이 거의 없다. 근대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사서 <오행지> 에는 미심쩍은 것이 많아 복요에 대한 기술 역시 어쩌면 미신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수상쩍은 것의 기록에서 도착 세계의 매력을 봤다. 여장이라는 관점을 도입한 순간 과거의 섹슈얼리티가 다채롭게 펼쳐진 것이다. 

                                       <여복지>

 

근대 이전은 성과학이라는 말도, 개념도 없었으며 성전환이나 양성구유, 음양사상을 용납하지 않았다. 역사 속에 묻혀진 사항을 복요 키워드로 해석하면 이장의 풍속사뿐 아니라 성동일장애의 문제까지 접근할 수 있다. 취미로서 여장은 역사가 오래되었다. <좌전>에 따르면 진나라의 영공(*중국 제후의 시호) 은 대신들과 함께 대부 하어숙의 아내인 하희와 밀통하며 하희의 속옷을 입고 조정에서 공공연히 장난을 쳤다고 한다. 애인의 속옷을 입는걸 여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여성의 옷을 입는 것에 쾌감을 느끼는 남자가 기원전 육백 년도 전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여장의 목적은 다양하다. 목숨이 경각에 처한 남자가 몸을 지키기 위해 여장을 한 경우도 있고, 여장을 하고 다른 사람의 재물을 노린 사람도 있다. 남녀의 교제가 금지된 시대에 여장은 연인에게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도 쓰였고 성범죄에 쓰인 경우도 있다. 실제로 남자가 여자로 변장해 신부 수업을 해준답시고 양가 규수를 간음하는 사건도 일어났다. 전족을 위장하기 위해 도구까지 발명했다는 말에는 입이 딱 벌어진다. 여성의 남장은 대부분 미담으로 전해지는 반면, 여장한 남자는 늘 웃음거리로 취부되었다. 인간의 심리는 복잡하다.

 


 

 

- 하희(夏姬) 에 대해서는 위키백과에 항목이 있어서 그대로 복사해왔다

 


 

어려서부터 이복오빠 공자 만과 근친상간을 했는데, 관계를 시작하고 3년이 되지 못해 공자 만이 죽었다. 이후 진(陳)나라의 대부 하어숙에게 시집을 갔고, 이에 “하희”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어숙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징서를 낳았는데, 하어숙은 하징서가 12살이 되던 해에 죽고, 하징서가 하어숙의 직위를 이어받아 진나라의 사마가 되었다.

그리고 40세의 미망인이 된 하희는 진나라 공작인 영공과 그 신하 둘인 공녕(孔寧), 의행보(儀行父)와 함께 넷이서 난교를 하며 즐겼다. 그런데 영공과 공녕, 의행부가 하루는 하징서를 불러다가 “징서가 자네를 닮았다” “아닙니다 주군을 닮았습니다”라면서 낄낄대고 놀았다. 이를 들은 하징서는 노하여 영공을 죽였다.

이듬해 초 장왕이 진나라로 쳐들어와 하징서를 죽였고, 하희는 초나라로 끌려갔다. 장왕은 하희를 탐내 첩으로 삼으려 했으나, 대부 무신(巫臣; 굴무(屈巫)라고도 함)이 반대하여 뜻을 꺾었다. 이에 아내를 잃은 다른 신하에게 시집보냈는데, 그 신하도 죽자 하희를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그런데 나중에 제나라 사신으로 가던 무신이 진나라를 지나는 길에 하희를 만나 함께 진(晋)나라로 도망가 버렸고, 장왕은 노하여 초나라에 있던 무신의 일족을 모두 죽였다. 하희는 무신과 결혼해 딸 하나를 낳았다. 이 딸도 어머니처럼 색기가 대단해, 진나라 대부 숙향과 결혼하여 양이아를 낳았다. 숙향과 하희의 딸이 결혼하려 했을 때, 숙향의 어머니인 숙희(叔姬)가 반대하면서 말하길, “하희는 남편 세 명과 아들 한 명을 죽이고, 나라 하나를 망하게 했으며, 군주 둘을 망치게 했다”라고 하였다.

유향의 《열녀전》에서 하희를 일러 “세 번이나 왕후가 되었고, 일곱 번이나 대부의 아내가 되었다. 여러 공작과 후작들이 미혹되어 정신을 잃지 않을 수가 없었다”(三為王后,七為夫人,公侯爭之,莫不迷惑失意)라고 하였다. 다만 하희는 왕후가 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