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둘러싼 모험

마음의 보물상자-추리작가 오리하라 이치2 '어머니의 책'

디멘티토 2020. 7. 27. 16:54

오리하라 이치가 경제신문에 기고한 수필 두번째 편으로 원문은 여기 https://r.nikkei.com/article/DGKKZO61442280T10C20A7BE0P00?s=3

 

 

어머니는 1923년 한문 교사인 아버지의 부임지였던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다른 오빠 나카지마 아츠시는 경성 중학교가 개교한 이래 가장 뛰어난 학생으로, 월반하여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국문과에 진학했다. 물론 이과 성적도 뛰어났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늘 우수한 오빠와 비교되곤 했는데, 아무리 점수가 좋게 나와도 칭찬받지 못하고 계속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서 낙담한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렇게 주눅들어 자란 소녀는 몽상의 세계로 도피하여 <겐지 이야기>부터 나쓰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을 읽는 한편, 요시야 노부코(*소녀소설의 원조라 일컫는 작가. 10대 때부터 소녀잡지에 글을 실었다)의 로맨스 소설에 빠졌다. 자연스레 여학교를 나와 문학부에 들어가리라 마음 먹었지만 남존여비 관념이 깊었던 집안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가정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래도 편집자가 되리라는 꿈을 접지 않아 친구가 다니는 출판사에 시험을 쳐서 합격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모에게 들켜서 가정과 교사가 되어야만 했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고 어머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억지 선택을 강요받던 시대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부모님과 오빠와 사별하고 말그대로 외톨이가 된 어머니는 바느질과 요리에 능숙한 가정과 교사였던 덕분에 그토록 혼란한 시대였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생은 정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단다" 가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그런 분이셨기에 어머니 방에는 문학전집과 소설책이 가득했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시느라 집에 안계신 틈을 이용해 방에 들어가 <삼국지>와 <수호전>부터 <폭풍의 언덕>, <레 미제라블> <위대한 유산>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을 읽었다. 

어머니와 같은 세대 남자는 전사자가 많았던터라 종전 직후는 여성이 결혼하기 힘든 시대였다. 어머니가 억지로 결혼하지 않았다면(이 세상에 내 존재는 없었겠지만) 가정과 선생님을 하면서 요시야 노부코처럼 로맨스 소설을 썼을지 모른다. 내가 추리소설을 쓰게 된 것도 그런 어머니의 몽상벽을 물려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는 현재 아흔일곱으로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