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둘러싼 모험

올해의 베스트 2022

디멘티토 2022. 12. 28. 16:48

한 해를 정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중 트위터에서 못다한 말을 간략하게 덧붙인다.

https://twitter.com/dimentito/status/1608666792230277125?s=20&t=-R7wYwPCpIfBQDi4kLYVag

-국외소설

<변발의 셜록 홈스 신탐 푸얼의 사건기록부> 트레버 모리스
변발의 셜록 홈스는 출간되기 전부터 소식을 들어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읽어보니 예상을 뛰어넘는 수작이었다. 말미에 실린 저자의 인사에 따르면, 이 소설은 홍콩사람인 저자가 셜록 홈스에게 보내는 연애편지인 동시에 셜로키언인 저자가 홍콩에 보내는 연애편지다. 그렇게 런던 베이커 거리의 셜록 홈스는 홍콩으로 건너와 푸얼이 되어 활약한다.
각 편의 제목과 내용은 원전을 충실히 따르면서 청나라 말기 홍콩 상황을 그려내고 있다. 미스터리이면서 역사 소설인 셈이다. 상당히 많은 주석이 붙었고 그걸 참고하며 읽느라 읽는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독서미터를 비롯해 아마존에 올라온 감상평에 재미있지만 읽기 쉽지 않다는 말은 그래서일 것이다.
얼마 전 2권이 출간되었는데 현지 독자들도 어렵다고 하니 각주의 양이 방대해지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해도 올해 읽은 소설 중 딱 한 권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없이 홍콩 홈스로 하겠다.



<타이베이 야구클럽 살인사건> 탕자방
제6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 수상작으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뽑혔다. 당연히 일본에도 번역되어 출간되리라 예상했는데 좌초되어서 역자분이 많이 아쉬워하셨다. 그런데 뜻밖에도 멀쩡하게 출간된 것이다.
지웨이란의 <타이베이 사립탐정> 이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하기로 예정되어 있다가 파기되어 몇 년이나 돌고 돈 끝에 분슌에서 나왔는데 야구클럽은 사립탐정만큼은 아니지만 유예의 시간을 거쳐 출간되었고 역시 분슌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저마다 주어진 몫의 운명을 타고 태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도 운명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인 것 같다.
이 소설에 대해서는 트위터에서 이야기 한 바가 없으므로 출판사 책소개를 빌어 줄거리 소개를 하자면,
타이베이 역에서 가까운 찻집 '그랜드슬램'에는 매년 야구 애호가들의 모임인 ‘구견회’의 정기 모임이 개최되고 있다. 그 해도 어김없이 모임이 개최되었는데 때마침 일본에서 프로야구가 시작된 지 3년 째이기도 하다. 당시 가장 주목받은 팀은 도쿄 여섯 대학 야구부로, 그날 밤도 화제의 중심은 와세다와 게이오 대학 대항전인 소케이센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타이완의 고웅상업학교 에이스인 오시타 히로시였다. 구견회에는 여섯 대학 졸업생이 참가했고 그들은 오시타를 자신들의 대학에 영입하려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그러던 중 구견회 회원 두 명이 서로 다른 열차에서 숨진 채 발견된다. 타이완 회원인 진수금은 타이베이 완화 역에서, 게이오 졸업생 후지시마 게이지로는 고웅 역 침대 열차칸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타이베이 남서 형사 이선해와 파트너 기타자와 히데타카는 사건의 비밀을 파헤친다.
역자 후기에서 심사평에 알리바이 붕괴 측면에서는 미스터 펫의 <버추얼 스트리트 표류기>나 <황>과 비교하면 수수해 보일지 모른다면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계보를 잇는다는 말이 나왔다고 언급하는데 그 말대로 본격 미스터리 측면에서 보면 약해 보일지 모르겠다. 탕자방은 <중국시보>에서 기자로 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기자라고 해서 꼭 그러리라는 법은 없지만 어찌되었건 경향상 본격보다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데 사회 상황과 풍경 묘사를 통해 당시 타이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대당니리옥> 천젠
대당니리옥은 서유기에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현장법사를 주인공으로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 유명한 서유기를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 거다. 이제껏 2차 창작 작품으로만 접했던 터라 이번에 구입해 읽었는데 익숙하지만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였구나 새삼 느끼며 원전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원전을 읽지 않고 2차 창작만 읽으면 작품의 오묘한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을 접하게 되면 항상 관련 인터뷰를 비롯해 자료를 찾아보곤 하는데 작가 인터뷰를 보고 전작도 몹시 관심이 갔다.
인터뷰에 따르면 작가의 전작 <프로이트 금지>는 프로이트의 생애와 연구를 세밀하게 고증해 프로이트와 융, 에리히 프롬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을 소설에 도입한 바 있다. 서유팔십일 사건 시리즈 첫 번째 권인 대당니리옥에도 이 방식을 썼다.
말하자면 현장이 천축으로 간다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고증학 기법을 통해 당시 역사 전반을 비롯해 도교 및 불교의 기원을 말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작가가 좋아하는 문학 장르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아한 표현법이 마음에 든 당시와 송사이고 다른 하나는 소설이다. 가장 좋아하는 중국 현대 작가는 김용과 위화이며 서양 작가는 빅토르 위고 및 발자크를 비롯해 여러 명을 들었고 일본 작가는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근래 들어서는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시리즈라고 하니 다음 권도 무사히 나와주길 바라고 있다.

<장치섬> 히가시가와 도쿠야
잡지 <미스터리스!>에 연재를 시작했을 때 읽을 수 있었고 코믹한 삽화 때문에 인상적이었다. 잡지를 매 회 구입한게 아니라서 중간에 한 번 건너뛰었고 후반부 역시 놓쳤기 때문에 단행본으로 나오길 학수고대 하고 있었다. 연재가 끝난 후 이제 나오겠거니 했는데 바람과 달리 출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툭하면 언제 나오냐고 투덜대곤 했다. 그게 6년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작년에 출간 소식을 접했는데 글쎄, 데뷔 20주년 기념이라지 뭔가. 그럴 속셈으로 감춰두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한편으로는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히가시가와 도쿠야는 오야지 개그가 난무한다는 이유로 작품 수준이 떨어진다는 비판까지 받기도 하는데, 저택섬에 이은 장치섬은 작가로서는 그런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진지하게 쓴 작품이다. 물론 어느 작품이든 진지하게 썼겠지만 이건 경우가 좀 다르다. 옥문도에 영감을 받은 작품은 많지만 코믹함을 가미해 유머를 선사하는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외딴섬 미스터리는 개성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연옥의 시간> 가사이 기요시
트위터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가사이 기요시에 대한 첫인상이 썩 좋질 않아서 한동안 비호감이었다. 그러다 독서 모임에서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여섯 번째 작품인 <오이디푸스 증후군>을 소개받아 읽게 되었고 그 뒤 <흡혈귀와 정신분석>을 접했다. 이후 국내에도 시리즈 첫 권인 <바이바이 엔젤>과 <묵시록의 여름>이 출간되었다. 중간부터 읽고 나중에서야 첫 권을 읽은 셈이다.
일본 작가가 외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 들기 마련이라 이 시리즈도 예외는 아니다. 프랑스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어쩐지 일본의 외국인 거리인 듯한 느낌도 든다. 이는 꼭 가사이 기요시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디공 시리즈가 적인걸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서양적 향취가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해도 가사이 기요시가 펼쳐보이는 프랑스적 분위기를 만끽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 없다.


<건널목 유령> 다카노 가즈아키
올해의 베스트를 작년보다 며칠 늦게 했는데 건널목 유령 때문이었다. 연옥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11년 만에 나온 작가의 작품인데 원서로는 처음 접해서 새로웠다.
다카노 가즈아키는 국내에 몇 권이 나왔지만 난 <13 계단>과 <제노사이드>만 읽었다. 원서로는 처음 접했는데 문장이 간결하고 단어 하나하나 신경 써서 고른 듯한 느낌이 들어 읽으면서 좀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고심해서 쓰고 있을 작가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번역본으로 읽으면서도 정돈된 문장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원서로 읽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사건과 사실을 충실하게 묘사하는 르포르타주 형식이기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유령보다는 귀신이라는 말이 더 익숙한 우리네 정서상으로 보면 건널목 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현상 이면의 바탕에 자리한 진실은 무엇인가를 다큐멘터리처럼 보여주는지라 실감 나게 읽을 수 있었다. 오랜 집필 기간 동안 문장을 고르고 다듬었을 작가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수사선 상의 저녁노을> 아리스가와 아리스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탄생한 지도 30년이 되었다. 그를 기념이라도 하듯 이번 작품에서 사뭇 다른 모습의 히무라 히데오를 선보였는데, 다른 신본격 작가와 달리 감수성이 풍부한 작가답게 이번에도 지역에 대한 애착과 감성을 잘 녹여냈다.
작가후기에 따르면, 이번에는 작가가 가장 좋아하는 세토내해에 위치한 섬을 무대로 했다. 제목에 저녁 노을이 들어간 까닭은 집필하기 전 취재하면서 본 풍경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다. 이번 작품은 이제껏 즐겨 쓴, 범행 동기로서 쓰이는 트릭이 아니라 여운이 남는 감성적인 본격 미스터리를 쓰고 싶다는 생각에서 집필했다고 밝혔는데 그래서인지 회고적 분위기가 강하다. 다카마쓰 출신인 아리스가와는 세토대교가 생기기 전인 어린 시절부터 시코쿠에 갈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세토 내의 풍경에 대한 향수가 강하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것은 6,7년 전으로 분슌의 의뢰를 받고 나서. 담당 편집자과 이야기를 나누나 편집자가 직접 가보자고 제안했고 숙박하게 될 섬을 고른 뒤 2016년 2월 히로시마와 사나기지마로 취재 여행을 떠났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자료를 정리하고 연재를 시작하는 와중에 코로나가 터졌다. 하지만 사회적 거리 두기는 집필에 전념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던 중 2020년 10월에 히로시마 견학이 가능해져 채석장을 다시 방문해 창작 힌트를 얻었다. 그 때문인지 읽다 보면 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코로나로 자유롭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작가의 배려일 것이다.


<하마지 겐자부로의 주술적 사건기록부> 아리스가와 아리스
어느덧 이 시리즈도 세 번째 작품이 나왔다. 처음 나왔을 때도 올해의 베스트로 꼽았는데 세 번째 작품 역시 베스트로 꼽게 되었다.
사실 수사선 상의 저녁노을이 좀 강했던지라 하마지 겐자부로는 상대적으로 약한 감이 있지만 그냥 지나치기엔 아깝다.
처음 하마지 겐자부로를 접했을 때 작품에서 묘사된 하마지의 모습에서 오십 대 중년남자로 상상했더랬다. 그런데 이번에 나오는 만화판에서 삼십 대의 젊은이로 그린 걸 보고 예상을 벗어난 모습에 조금 의외였다. 그걸 보면서 역시 사람의 상상력은 같은 걸 보고도 서로 다른 곳에서 떠도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몇 번 보다 보니 히무라 히데오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게 여러모로 좋겠다 싶다. 본격 미스터리인 히무라 시리즈와 달리 하마지는 괴담을 바탕으로 한 미스터리라고 볼 수 있는데, 작가 후기에서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괴담이기도 하고 미스터리이기도 하지만 결국 어느 쪽도 아니기도 하다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받아들이는 쪽에서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될 것이다. 나는 괴담도, 미스터리도 그 어느 쪽도 아닌 쪽으로 받아들였다. 다만 세상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롭거나 괴이한 일들이 있고 그런 현상을 이야기로 옮긴 것이라 말하고 싶다.


-국외 비소설

<파졸리니> 요모타 이누히코
국내에 출간된 평전은 죽음에 이르게 된 충격적인 폭행 사건으로 시작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파졸리니의 파격성은 충격적인 죽음으로 완성되기에 그렇겠지만 시작이 그러면 이어서 나온 어린 시절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시시해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뿐만 아니라 책 전반의 분위기 역시 선정적인 면이 다분하기에 읽으면서도 내심 비호감이 들기도 했다.
그에 비해 요모타의 평전은 시간 순서대로 파졸리니의 삶을 훑어나간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고 파졸리니의 작품을 삶과 연관 지어 꼼꼼하게 분석한다. 서문에 작품 표기법을 비롯해 세세한 집필 원칙을 세워 작업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데 각고의 노력 없이는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존경심이 들었다.


<신 론 오타쿠와 아방가르드> 오쓰카 에이지
이전에도 오쓰카 에이지는 만화와 관련된 책을 썼고 국내에도 몇 권이 출간되었지만 그건 연출을 비롯한 창작 기법 이야기지 한 작품을 분석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책에서도 오쓰카 에이지 특유의 작품 분석이 돋보이지만 이렇게 한 작품만 끈질기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그동안 에반게리온을 둘러싼 다양한 해석과 분석 및 비판적 담론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지만 오쓰카 에이지로 인해 그런 흐름이 일단락된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건 새로운 흐름을 예고하는 징조일까.





<후기자본주의 욕망> 마크 피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이뤄지지만 많은 경우 타인에 의해서 자극 받고 배우며 터득하게 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스스로 방법을 찾아 자신만의 사고관을 키우는 것일게다. 강의록에서 마크 피셔가 강조하는 것 또한 그런 것이다. 다양한 주제를 통해 포스트자본주의란 무엇이고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퍼지는지 진지하게 논하는 과정에서 한국에 대한 이슈도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 그걸 보며 세계 위상에서 한국의 위치를 되새길 수 있어 살짝 가슴이 두근거렸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훌쩍 세상을 떠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 의식을 일깨웠을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이제 그의 글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게 애석하다.




<마쓰모토 세이초 평론집 19578-1988>
작가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비평은 에세이와 좀 다르다. 국내에 출간된 <일본의 검은 안개> 및 <미스터리의 계보> 등 논픽션을 통해 비평 의식을 엿볼 수 있지만 이는 어떤 사건을 바탕으로 바라보는 사회 비평에 가깝다. 하지만 이 평론집은 다른 작가의 작품을 비평한 글 모음으로, 세이초의 새로운 면을 알 수 있어 좋았다.







<자유대담> 나카무라 후미노리
미스터리 신을 통해 알게 된 뒤 늘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이한 그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건네고 싶다. 그때 리트윗 하기도 했지만 멋진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범죄 소설은 사회에 던지는 작가의 메시지이고 소설을 통해 나카무라 후미노리는 어두운 사회의 단면을 파헤치고 그를 통해 독자는 그의 관심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알 수 있다.








-국내 소설

<서왕모의 강림>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사탄탱고 이후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는데 그 이후로 다른 소설 두 권이 더 나왔고 서왕모의 강림은 네 번째 책이다. 사탄탱고에서 두 권을 건너뛰고 서왕모로 오면서 공백이 생긴 것 같지만 그거야 채우면 될 일이다. 교토를 배경으로 한 단편이 몇 편 되는데 무척 반가웠다.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은 소설이라는 수로를 통해 끊임없이 흘러간다. 도도히 흐르는 말의 물결은 한 순간도 막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며 차곡차곡 이야기를 쌓는다.
말들이 지나간 흔적을 따라 유영하다 보면 이윽고 이야기의 끝에 다다르게 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어 때로 길을 잃기도 하지만 읽다 보면 어느새 제자리로 찾아가게 되어있다.
이 작품은 물결을 따라 헤엄치며 나아가며 새로운 만남이 이어지는 여행처럼 신비로움으로 가득하다.



<나보코프 단편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해설에 따르면 나보코프가 단편을 쓴 시기는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잠시 옮겨 프랑스어로 창작을 시도한 1930년대부터이다. 이후 미국에 정착해 영어로 장편소설을 집필한 1950년대까지 나보코프는 모두 일흔 편의 단편소설을 썼다. 박물관 방문은 프랑스에서 잠시 살던 1930년대 말에 쓴 단편이다. 예전부터 나보코프의 글을 대하노라면 좀 심술궂어서 얄밉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런 심성은 아마 명문 귀족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혁명으로 오랫동안 여기저기 떠도는 과정에서 남과 어울리지 못한 편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단편집에 수록된 소설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안에 스며든 감성으로 인해 환상 소설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나보코프는 때로는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때로는 투덜거리며 꿈을 꾸고 상념에 젖어든다.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 J. L. 카
말년에 농사나 짓겠다며 전원 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이젠 귀농도 일종의 상투적인 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말하자면 장르물의 클리셰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더라도 같은 행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전쟁으로 상처입은 인물들이 모여 시골 생활로 회복되어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요크셔 시골은 시종일관 낮은 호흡으로 천천히 이어간다. 그 과정은 우아하고 때로 슬퍼서 가슴을 저미기도 한다.





<내가 행복한 이유> 그렉 이건
하드 SF의 거장을 이제서야 영접하게 되었다. 사실 이쪽 분야는 미스터리에 비해 덜하지만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모르는 분야를 알려고 하는 시도는 늦은 때는 없는 법이다.

일곱 살 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했다는 그렉 이건의 어린 시절은 흥미를 유발한다. 그래서일까 무신예찬에서 말한 어린 시절 일화가 유독 마음에 남았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화두는 클리셰처럼 뻔하게 느껴지는데 그럼에도 진지하게 골몰하게 되는 것은 마찬가지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작가의 이야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에 작가 인터뷰를 인용하며 자세하게 설명해줘서 고마웠다.



<리가의 개들> 헨닝 만켈
발란데르 시리즈를 알게 된 지도 이제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고 그 기간 동안 망켈이 세상을 떠났다. 더이상의 발란데르 이야기는 지속될 수 없지만 우리에겐 아직 만나지 못한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아끼는 마음으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전 본 아이슬란드 드라마 <트랩트>의 안드레를 보면서 발란데르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북유럽 스릴러에는 환경에 따른 숙명적인 비극이 내재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제목에서 저수지의 개들이 떠올랐는데, 분위기도 내용도 다른 리가의 개들에는 변함없이 북유럽 특유의 스산함이 진하게 배어있다. 하지만 리가의 개들은 발란데르 시리즈 중 가장 긴박감이 넘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저수지의 개들이 연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또한 북유럽에서 생소한 나라인 라트비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위키에 나온 초판 표지를 보면 마치 나치 치하의 유럽을 연상시키는데 작품 속 라트비아는 공산국가였다. 핏빛으로 물든 원서 표지에 비하면 한국판 표지와 일본판 표지는 다소 낭만적이기까지 하다.





-국내 비소설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시> 나카가와 유스케
원서로 인상깊게 읽었고 번역되어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매불망 출간되기만 기다렸던 책이다. 다행히 늦지않게 만나게 되었다.

일본 미스터리의 양대 산맥인 란포와 세이시를 다룬 이 책은, 두 인물을 통해 일본 출판계 역사를 아우른다. 원서는 몇몇 오류를 바로 잡고 내용을 덧붙인 개정증보판이 나왔는데 번역서에 그 내용까지 모두 포함되어서 무척 기뻤다.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에코의 위대한 강연> 움베르토 에코
제목부터 위대한 강연인데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닥치고 찬양할 수 밖에. 처음 <장미의 이름>으로 알게 된 이후로 움베르토 에코에 대한 관심은 늘 지대했다. 특히 친구의 가족이 중세학회 회원인지라 에코에 대한 일화를 들었기에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 강연집은 2001년부터 에코가 세상을 뜨기 전 2015년까지 쓴 글 모음으로, 말년의 에코에 대해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어떤 존재가 아름답기 위해서는 그 개체가 갖추어야할 모든 것을 지니고 있어야 함에도 괴물들에게 매료된, 모순에 찬 중세의 미학은 움베르토 에코에 의해 절묘하게 전파된다.




<액체 현대> 지그문트 바우만
먼저 강렬한 표지가 눈길을 끌었고 사회 현상을 주술과 연관지어 분석한 내용에 눈길이 갔다. 현 시국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 사회는 결코 어느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유동적이며 마치 액체와 같다는 분석은 자못 흥미롭다. 20년 전에 출간되었고 2012년에 나온 책 개정판임에도 올해의 책에 꼽은 것은 물론 그 전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을 접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상은 시간이 지나면 퇴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담론을 생성하기도 한다.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색있는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일 것이다. 액체 현대에서 이야기하는 유동적인 사회에 대한 분석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참신한 시각을 제시한다.


<사운드 오브 재즈 : JBL 스토리> 이종학
예전부터 스피커에 관심이 있었고 때마침 이 책이 출간되어 반가웠다. 소리의 영역은 생각보다 방대하며 울림이 남기는 족적은 의외로 크다. JBL은 이름만 들어봤지 관심도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보면서 마니아의 세계는 깊고 다양함을 절감했는데 브랜드 역사를 통해 음향기기가 어떤 궤적을 밟았는지 엿볼 수 있어서 자못 흥미로웠다.







<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 정서경
영화로는 꼽지 못해 대신 책으로 꼽는다. 영화에서 미처 보여주지 못한 인물들의 미세한 변화가 새롭게 다가왔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 기분이다. 올해는 꽤 많은 영화를 보았고 두 번이나 관람한 영화도 몇 편 있는데, 헤어질 결심도 그 중 하나다. 새삼 박찬욱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봤는데 세상에, 난 그의 데뷔작과 두번 째 작품까지 봤음을 깨달았다. 비록 어떤 내용인지는 까맣게 잊어버렸어도(3인조는 어렴풋이 기억이 나지만) 영화를 봤다는 사실만큼은 제대로 기억에 남아있다. 반면, 그를 유명하게 만든 공동경비구역은 보지 않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역시 복수는 나의 것인데,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았다. 보는 내내 구역질이 났고 이토록 잔인한 암흑의 세계를 보란듯이 펼쳐보이는 광경에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어쩐지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그 뒤로 계속 그의 작품을 챙겨보게 되었다. 헤어질 결심은 이전 작품들 경향을 생각하면 다소 말랑한 구석이 있는데 아마도 탕웨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영화 속 서래와 조금 다른, 글로 이루어진 이야기 속 서래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올해의 책

<탐정소설의 고고학> 레지스 메사크
생전에 빛을 보지 못하다가 사후에 이름이 알려지는 경우가 종종 있고 메사크 역시 그런 예 중 하나다. 어떤 인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삶이 어떠한가에 비상한 촉각을 세우는 나는, 평생 무명으로 살다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의 삶이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탐정소설 고고학>은 1929년 레지스 메사크 이름으로 간행된 박사논문으로, 메사크가 쓴 평론은 그외에도 일곱 편이 더 있다. 일본에는 1938년 에도가와 란포가 주목해 출간 의뢰를 했고 대학원생에게 번역을 부탁했으나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릿쿄 대학의 란포 박물관에는 당시 란포가 출간되기 원했던 레지스 메사크의 <탐정소설사> 번역본이 있다. 이 책이 출간된 경위에는 란포 박물관에 있는 자료가 포함되어 있고 해설에는 그 점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란포는 탐정소설에 치중한 나머지 메사크의 다른 면은 살펴보지 않았는데 그가 SF 소설을 썼다는 사실도 몰랐다.
메사크는 1차 세계대전 중 부상을 입고 귀환한 뒤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그 뒤에는 프랑스를 떠나 스코틀랜드의 글래스코 대학에서 외국인 강사로 근무했으며 그후에는 매길대학에서 보냈다. 그가 관심을 보인 대상은 영어권의 새로운 문학인 추리소설과 SF소설이었다. 1929년 프랑스로 돌아와 박사 논문 <탐정소설과 과학사상의 영향(Detective Novel et l'influence de la pensée scientifique)>을 썼다. 나치 점령 당시 레지스탕스에 협력했으나 폭력 활동은 하지 않았다. 1943년 체포되어 수용소를 전전하다 사망했다. 위태로운 시기에 쓰여진 메사크의 탐정소설론에 당시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사회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의 주목 작가

아즈미 라이도
아즈미 라이도는 현재 작가 나나키 유시로 시리즈 네 권, 시리즈화 할 요량으로 내놓은 가짜 영매사 구레비 주조 이렇게 총 다섯 권을 냈다. 나나키 유시로가 미스터리라 해도 호러 경향이 강한 반면 구레비 주조는 심령 미스터리다. 그리고 내 취향은 구레비 주조다.
요즘 일본 미스터리는 신인작가들의 약진이 활발하고 침체기에 빠져있던 미스터리 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그렇세 서서히 물갈이가 되는 듯 한 느낌이 든다. 그런 와중에 꾸준한 노력으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이 작가는 이대로 성장하면 언젠가 대가의 반열에 오를지 모르겠다. 그러기를 바란다.


-올해의 만화

<도박꾼들> 오노 나쓰메
올해부터 추가한 항목. 만화 분야는 보고 끝내고 어쩌다 트위터에 간단한 감상을 남기는게 다였는데 진지하게 다뤄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노년에 접어드는 중년 배우를 기용한 액션물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이야기는 다소 식상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참신한 느낌이 든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업계 풍속도를 보면 만화도 예외는 아닌데 오노 나쓰메는 한결같다는 느낌이 든다.
드라마나 영화를 연상케하는 간결한 그림체, 묘하게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화면 구도 등 이모저모 뜯어 볼 구석이 많다. 오노 나쓰메는 노년에 접어든 중년 남성 이야기를 즐겨 썼고 그런 인물들을 표현하는데 재주가 뛰어나다. 중년 도박사 콤비로 돌아온 그의 새로운 이야기가 몹시 기다려진다.




-올해의 영화

파졸리니 탄생 100주년
<살로 소돔의 120일>로 파졸리니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였다. 한창 인생을 즐길 나이에 병마와 싸우며 깊은 우울의 늪에 빠졌고 가정적으로도 문제가 끊이질 않았던 터라 세상이 원망스러웠고 늘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행에 옮겼다. 그렇게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도 아니면 죽을 팔자는 아니었는지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가 자살 시도를 세 번이나 했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가족을 비롯해 주위에서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오랫동안 가슴 속에 꼭꼭 담아두고 꺼내지 않던 혼자만의 비밀을 트위터에서 이야기 했다. 그때까지 텔레비전에 나오거나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머리 속으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직접 체험해보고서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 전까지 무겁게 짓누르던 혼자만의 비밀이 더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을 때 느껴지는 상쾌함을. 묵을대로 묵어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흔적이 말끔히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렇게 드러낸 것이었구나.
그런 힘든 시기에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 채 친구의 간단한 소개만 듣고 살로를 보게 되었다. 어쩌면 안 보는게 좋을거라고 극구 말리던 친구의 반응에 대한 반항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보고난 후 친구의 말을 듣지 않은 걸 무척 후회했고 파졸리니가 그렇게 죽은 것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토록 끔찍한 영화를 찍은 감독은 어떤 사람일지 몹시 궁금했다. 어릴 때부터 삶 보다 죽음이 더 가깝게 느껴졌던 나로서는 영화만큼 충격적인 파졸리니의 죽음에 대한 관심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던 것이다. 루이 알튀세르에 대한 관심이 그러했듯.
그후로 파졸리니는 내 삶을 지탱해줬고 이윽고 우상이 되었다. 그의 영화를 보며 그가 꿈꾸고 말하고 싶은게 무엇인지 깨닫기 위해 애썼고, 그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 소설을 읽었고, 그를 알기 위해 평전을 읽었다.
그런 의미에서 탄생 백 주년이 되는 올해는 그의 삶을 한층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어 뜻깊은 한 해다. 영화를 통해, 그리고 전기를 통해 새롭게 되새기는 파졸리니가 그 어느 때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아직도 그가 백 년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