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둘러싼 모험

아야쓰지 유키토에 대한 추억

디멘티토 2022. 12. 20. 16:47

마스토돈에 올렸던 내용을 정리해 옮겨놓는다. 한창 트위터 위기설이 돌 때 대체제로 마스토돈에 계정을 만들었고 글도 몇 꼭지 썼는데 영 적응이 되지 않아 어찌할까 생각중이다. 그래서 몇몇 글은 여기에 정리해 남겨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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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인분이 아야쓰지 유키토의 작품이라면 논문을 쓸 수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난 접하기 전부터 오노 후유미 때문에 비호감이었다.
(왜 비호감인지는 예전에 작성한 트위터 타래를 옮겨와 정리)
오노 후유미의 대표작은 십이국기지만 난 그 전에 고스트 헌트로 알게되었다. 고스트 헌트는 처음 <악령>이라는 제목으로 나왔고, 이후 개정판으로 다시 나오며 <고스트 헌트>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이 제목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이 시리즈는 팬덤을 형성할만한 요소가 많아 초창기부터 막강한 팬덤을 자랑했다.
그런데 고스트 팬들이 가장 싫어하는 작가가 바로 아야쓰지 유키토다. 오죽하면 당시 떠도는 말 중 하나가 '아야쓰지 유키토의 안티 중 90%는 오노 후유미 팬일 가능성이 높고 그 중에서도 고스트 헌트 팬일 가능성이 99.9% 다' 였다. 예전에 아야쓰지 유키토가 트위터에서 위키피디아에 개재된 자신의 항목 중 결혼 관련 부분이 사실과 다르므로 삭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삭제되었다고 말한 바 있는데(아야쓰지 유키토가 오노 후유미한테 결혼해 달라고 마구 들이댄 것 같은 어조로 기재되어 있었다) 난 그렇게 쓴 게 혹 고스트 팬이 아닐까 했다.
당시 고스트 팬들이 아야쓰지를 싫어했던 이유는, 악령 시리즈가 어설프게 매듭이 지어진 채로 끝이 났고 <악몽이 깃든 집>이라는 제목의 후속편 두 권만 달랑 나오고 긴 공백기를 거쳐서였는데 그 기간동안 오노 후유미는 아야쓰지 유키토의 집필을 돕느라 정작 자신의 작품을 쓸 여력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나온 작품이 바로 아야쓰지 유키토의 두번째 대표작이라 일컫는 <어나더>이다.
어나더가 나오고 나서 고스트 팬덤의 분노가 폭발했는데, 어나더의 설정이며 인물이 고스트 헌트와 닮은 점이 있고 그때까지 학원물은 한번도 써보지 않은 아야쓰지가 그럴듯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은 오노 후유미가 물심양면으로 도왔을거란 이유에서였다. 그러느라 자기 작품(고스트 헌트)은 쓰지도 못한 것이라고 추측했다.
관 시리즈도 호러 경향을 띠지만 본래 학원 호러물은 오노 후유미의 장기였고 어나더가 온전히 아야쓰지 유키토 혼자만의 생각에서 나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전적으로까지는 아니어도 오노 후유미가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작가가 원해서 그런거고 막말로 아내가 남편 작품 쓰는 걸 돕겠다는데 아무리 팬이라도 뭐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잖나. 고스트 헌트 팬 입장에서는 오노 후유미의 능력을 이용한 아야쓰지 유키토가 눈꼴시렸을 것이다(나도 그랬으니까)
그래서 어나더 해체 작업을 실시해 유사한 점을 조목조목 짚어 비판했다. 고스트 헌트 개정판이 나왔을 때 전면적으로 수정을 가했다고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령>만큼의 수준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에 팬덤의 분노는 더욱 커지고 모든 원망이 아야쓰지 유키토한테 갔는데 부부가 몰랐을 리 없을 것이다. 어쨌든 고스트 헌트는 어설픈 상태로 마감을 했고 오노 후유미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더이상 팬들의 바람에 부응할 수 없다며 이와 관련해서는 어떤 코멘트도 하지 않겠노라 절필 선언을 했다.
그 후 일본 미스터리에 관심이 생겨 이런저런 작품을 챙겨보기 시작했을 때 아야쓰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고 그렇게 눈꼴시릴 수가 없는거다. 선입견과 편견은 이토록 무섭다. 그런 이유로 아야쓰지 유키토의 작품에 대해서는 읽었다 해도 어디에서건 감상을 말하지 않는다. 더구나 아야쓰지의 조잡한 문장을 견디지 못하겠다. 아야쓰지의 글을 보다가 아리스가와 아리스 글을 보면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고, 렌조 미키히토로 넘어가면 한 편의 시다.
그래도 트위터에서 오랫동안 구독은 하고 있었는데 얼마전 구독 취소하는 바람에 약간의 연결고리마저 끊어졌다. 그런데 홀가분 한 것이다.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왜 진작 끊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고작 언팔 했다고 이렇게 해방감이 들 정도인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그때 지인 말씀의 요지는 아야쓰지 소설은 논리적이고 기계적이기 때문에 구조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면 트릭 운용만 가지고도 한 편의 논문을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장이 어떤가는 별 상관없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새삼 소설을 논하는 방식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런 방식이라면 장르 문학을 비롯해 웹소설도 충분히 고찰해 볼 수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가사이 기요시의 <공의 경계> 해설이 여러모로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또한 국내에도 번역되어 나왔으므로) 난 소설가로서 가사이 기요시보다 평론가로서 가사이 기요시를 좋아하는데, 그의 현학적인 글쓰기 방식은 가끔 평론이나 해설에서 돋보일 때가 있다. 예리하면서도 호전적이다. 그런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학창 시절 운동권에 있었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소설을 논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어떤 소설은 감성적으로 접근하기 보다 기계적으로 접근할 때 그 작품의 본질을 알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기계적으로 일관하지는 않겠지만 감성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 특히 웹소설 같은 경우 기계적 접근 방식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짧든 길든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야기를 쓴다고 해서 꼭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는 없을테니 말이다.
나는 감성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다분한지라 그런 기계적 접근 방식은 딱히 좋아하진 않지만 다양한 방식을 시도해 보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겪으며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요즘 평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누가 어떤 글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글을 어떻게 봐야할 것인가 논하는 글도 못지않게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