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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핀 벚꽃 숲 아래 -사카구치 안고

'활짝 핀 벚꽃 숲 아래(桜の森の満開の下)' (1947)는 사카구치 안고의 단편 소설로 안고의 대표작 중 하나이며 설화적 분위기가 짙다. 국내에도 번역되어 나왔지만 생소하지 않을까 싶어 내용 소개를 하자면, 어떤 산마루에 산적이 살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여행객의 금품을 강탈한 뒤 죽이고 동행한 여인이 마음에 들면 자신의 여자로 삼았다. 산적은 산이 자신의 것이라 여겼지만 딱 한 군데 벚나무 숲만큼은 두려워 했는데 벚꽃이 활짝 필 무렵 나무 밑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면 미쳐버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봄 날, 그 날도 산적은 여행객을 덮쳐 죽이고 동행한 여인을 산채로 데려왔다. 남편이 죽는 모습을 봤음에도 여인은 산적을 무서워하지도 않고 이것저것 지시했다. 여인은 산적으로 하여금 산채에..

프리다 칼로 사진전

프리다 칼로를 알게 된 것은 헤이든 헤레라의 전기를 통해서였다. 당시만 해도 프리다 칼로는 생소한 화가였으며 국내에 나온 저작이 없었다. 아마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헤이든 헤레라의 프리다 칼로 전기를 뛰어넘는 책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적어도 국내에 나온 칼로 관련된 책 중에서는. 르 클레지오 역시 칼로에 대한 책을 썼는데(국내에 나와있음) 를 읽은 이후로 나는 이 작가의 비대한 자아를 견딜 수 없었다. 많은 프랑스 작가들이 프랑스적인 기질을 발휘해 소설을 쓰고 수필을 쓰지만 클레지오의 칼로에 대한 책은(그건 전기도 뭣도 아니다) 자신이 상상하는 틀에 가둔 상상 속 칼로에 불과하다. 그래서 미련없이 버렸다. 헤이든 헤레라는 프리다의 삶을 충실히 그리면서도 그녀의 내면까지 깊게 파고들며..

보고 듣고 2023.04.04

어떤 기억

여덟 살인가 아홉 살인가, 아마 아홉 살 때일 것이다. 작은 아버지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 때문에 자주 방문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은 수세식 화장실이 보편화되지 않아 외부에 설치되었다. 흔히 말하는 변소였다. 그 근처는 친가 쪽 친척들이 모여 사는지라 그 중 한 집을 방문해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용변이 급해 변소를 찾았다. 어렸을 때부터 집 외에 화장실을 가는걸 꺼려했는지라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변소 문을 연 후 보고 말았다. 거기에는 어떤 여성이 목을 매 죽어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머리카락이 얼굴을 뒤덮고 있었기 때문에 표정까지 보지는 못했다. 한참을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지만 어쩐지 외면할 수 없어 빤히 쳐다봤다. 그 때의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스치는 단상 2023.03.28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향해

그림에 대한 꿈을 접고 대학생이 되었을 때 그 대신이라고 할 지 사진과 영화, 건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전공으로 삼고팠던 그림은 취미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부산물처럼 사진과 영화가 새로운 관심사가 되었다. 건축은 어려서부터 그림과 함께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아버지가 건설 쪽에 몸을 담고 있던 것도 한몫했다. 친구 역시 영화 쪽에 지대한 관심이 있어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 싶어했고 나 역시 그 작업에 기여를 하고 싶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으니 사진에 대한 감각도 그 비슷하게 있겠거니 멋대로 단정하고 돈을 모아 괜찮은 카메라를 사 여기저기 찍으러 다녔다. 하지만 사진 찍는 기술은 전혀 늘지 않았고 그쪽에는 영 재주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어영부영 하는 사이 영화를 찍겠다는 소망은 자취를 감췄다. 친구도 ..

스치는 단상 2023.03.12

살로 혹은 소돔의 120일

은 사드 후작의 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파졸리니의 마지막 작품이다. 요모타 이누히코의 에 따르면, 살로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브레시아도에 위치한 도시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살로라는 이름에는 이탈리아의 암울한 역사가 담겨있다. 1943년 무솔리니를 체포한 연합군은 무솔리니의 뒤를 이어 새로운 총리로 피에트로 바돌리니를 내세웠다. 바돌리니는 이어 휴전 협정을 체결했고 이를 배신 행위로 간주한 독일이 무솔리니를 탈출시키고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수립한 곳이 바로 살로다. 그렇게 탄생한 살로공화국은 독일군을 지지했고 공포 체제에 돌입했다. 이 시기 독일군은 770명의 주민을 학살했다. 파졸리니는 영화에서 도로 표지판을 등장시켜 배경이 살로임을 보여주고 있다. 원래 살로는 세르조 치티가 기획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