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둘러싼 모험

렌조 미키히코와 가사이 기요시의 일침

디멘티토 2020. 7. 30. 15:44

비판에도 각자의 스타일이 있다. 본격 미스터리를 폄하하는 이들에 대한 두 작가의 비판 논조는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다. 하여 렌조 미키히코의 수필 '나의 탐정소설관' 일부와 <본격 미스터리의 현재> 서문 일부를 옮겨본다. 같이 놓고 보면 차이점이 드러나기 마련.

 

나의 탐정소설관 -렌조 미키히코.

탐정소설이 보다 놀이 요소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시선 끝자락에 두고 경시하는, 스스로를 문학광이라 일컫는 이를 만날 때마다 경시하지 않는 나는 외면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편견의 울타리로 자신을 에워 싼 사람이 어째서 인간과 관계를 맺기 위해 순문학을 읽으려고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보다 놀이 요소가 많다고 썼습니다. 이것이 빈약한 독서력에서 비롯된 제 탐정소설관의 한계일까요. 하지만 저는 탐정소설이 놀이를 위한 문학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보다' 라는 두 글자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누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라는 본격 탐정 소설 부정론이 있는 모양입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게는 누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지가 지대한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에 크리스티가 쓴 모든 작품에는 등장인물이 처형됩니다. 기상천외하지만 사실은 슬픈 살육 이야기인 겁니다. 평소 인간의 죄를 응시하던 크리스티의 시선과 비교했을 때 애크로이드를 죽인 범인의 의외성은 어찌 되던 상관이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호막이라 하기엔 많이 부족한가요? 하지만 소설 분야에서 탐정소설을 다른 장르와 구별짓는 저의 경계선은 지극히 애매합니다. 제 안에서 포크너의 <팔월의 빛>과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는 완벽하게 똑같은 가치를 지닙니다.

이 두 작품의 위대함은 바닥의 저 끝에서 끌어올린 복잡한 이야기를 단 한사람이 피라미드처럼 쌓아 올렸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구성력이기에 포크너가 죽인 것은 인간이며, 요코미조 세이시가 죽인 것은 수수께끼의 하나라고 구별하는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현재> 서문 가사이 기요시 -탐정소설의 지질학

<십각관의 살인>으로 아야쓰지 유키토가 등장한지 어느덧 십년이 지났다. 1990년대 본격 미스터리 물결이 처음 일어난 것은 1920년대 중반, 두번째는 1940년대 중반이다. 그리고 지금 그를 뛰어넘는 세번째 격랑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완고한 논객도 존재하는 모양이다. 그들은 현재 스스로의 부정론에 대한 근거를 엄중히 묻고 있다. 시대착오적이다, 소설 골격이 갖춰지지 않았다와 같은 표현으로 무지와 비평의 빈곤을 드러내는 논객의 비판은 오히려 문제 축에 들지도 못한다. 또한 칼럼이나 시평에서 술렁 술렁 쉽게 써내려간 개인적 감상 역시 취미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자의적인 감상과 취미의 확장을 비판이라고 할 수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몇가지 의미를 부여함으로서 보편성을 지향하는 작품 평가라고 할 수도 없다.
칼럼 등에서 비판 수준 근처에도 미치지 못하는 글로 본격 혐오를 드러내는 적지 않은 논객들이 제3의 물결이 용솟음치는걸 보며 깊은 한숨과 침묵을 선택하고 있다. 이는 자신들의 비평 정신이 결여되었음을 폭로하는 동시에 보신에 급급한 기회주의의 정점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