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기사: https://www.sankei.com/west/news/181211/wst1812110019-n1.html
수많은 중국 역사소설을 쓴 진순신은 9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고베 시에 살았고 고베를 사랑한 작가였지만 작가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는 전쟁 전 오사카에서 공부던 때. 본격적인 진순신 월드에 들어가기 전초전으로 오사카 어학 연구소에 있었을 때 이야기
진순신의 글이 처음으로 실린 것은 1945년 오사카 문학잡지 <신문학> 3월호. '인도 현대시선'이란 제목으로 인도 시를 번역해 소개했다. 당시 이 잡지에는 오다 사쿠노스케의 '사루토비 사스케(*소설에 등장하는 가공의 닌자. 모델이 된 인물이 실재했다는 설도 있다고)도 실렸다.
*오다 사쿠노스케(織田 作之助)는 오사카 출신으로 다자이 오사무, 사카구치 안고, 이시카와 준과 함께 무뢰파로 불린 작가
당시 진순신은 오사카 외국어 학교 인도어부를 졸업하고 모교의 서남 아시아어 연구소 조수로 힌디어 사전 편집에 참여하고 있었다. 때마침 연구소 동료가 서하(*티베트 분파인 탕구트족)어 연구의 일인자인 이시하마 준타로와 친분이 있어 함께 이시하마 집에 드나드는 와중에 작가인 후지사와 다케오와 알게되었다. 후지사와 다케오는 이시하마 준타로의 조카로 오사카 문단을 이끄는 존재였고 <신문학>고문을 맡고 있기도 했다. <신문학>은 도쿄를 비롯한 다른 곳에서 시도도 하지 못한 잡지 발행 독자적으로 행하던 중에 간행되는 문학잡지였는데 시기가 시기인지라 도피성 목적에서 동아시아 문학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진순신의 번역이 잡지에 실리게 된 것이다.
그와 관련해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면, 당시 진순신은 모교에서 연구자의 길을 가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순탄하게 그 길을 갔을 테지만 잡지에 글을 발표했을 무렵은 모교와 고베가 공습으로 인해 전소되었다. 하여 항구 근처 3층으로 된 화교상가 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장편소설 <삼색집>의 모델이 된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진순신의 신분이 크게 달라졌다. 국적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꿨던 것. 당시는 외국인은 국립대학 교수가 될수없었다. 계약직으로 일할수도 있었지만 불안정하여 그만두기로 마음 먹었다. 자전적 소설 <청운의 수레바퀴>에는 친구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의 불안한 심경이 담겨있다.
"넌 연구 계속 할거지?"
"그러기는 힘들지"
"왜?"
"전쟁이 어떻게 끝날 것 같아? 대만은 중국으로 반환되고 조선은 독립하겠지. 그럼 우리는 중국인이 될거야"
"그럼 조국의 품으로 돌아가는 거잖아"
"지금 일하고 있는 학교는 국립이라 외국인은 교수가 될 수 없어"
"그렇군. 교수가 되는 길이 막히는구나. 좋은 일만 있는게 아니네"
"하하하"
연구소를 떠나도 연구는 계속 할 수 있다.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하지만 진순신의 삶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고 작가로 데뷔하기까지는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종전 직후 진순신은 자신의 뿌리를 알고자 대만으로 갔다. 1946년의 3월의 일이다. 타이베이 교외에 살고 있는 친척에게 신세를 지면서 고향에 새로 생긴 중학교 영어 교사가 되었다. 하지만 다음해 2월, 대만 사람들의 꿈을 깬 2.28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가 주민을 탄압한 2.28 사건은 대만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사건을 직접 목격한 진순신은 교사 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다. 대만에서 생활은 3년 반으로 끝나게 된 것이다. 일본의 패전과 대만의 혼란. 그 후 진순신은 본가의 일을 도우면서 밤에는 책상을 마주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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